과거, 냉장 시설이 없던 시절에 얼음은 매우 귀한 자원이었습니다. 특히 국가의 제사나 연회, 그리고 왕실과 백성의 더위를 식히기 위해 겨울철에 얼음을 채취하여 전문적인 얼음 창고인 빙고(빙고)에 저장하고 이듬해 봄부터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얼음 관리를 위해 나라에서는 추위와 얼음을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이 바로 사한제(司寒祭)입니다. 얼음과 관련된 국가 의례, 사한제의 역사와 내용을 자세히 살펴봅니다.
사한제(司寒祭)란 무엇이며 왜 지냈나?
사한제는 겨울의 추위와 북방을 다스리는 신인 현명씨(玄冥氏)에게 올리는 국가적인 제사입니다. 이 제사는 주로 사한단(司寒壇)이라는 제단에서 거행되었습니다. 사한제를 지내는 가장 큰 목적은 국가에서 사용할 얼음을 제대로 관리하고 자연의 순리가 어긋나지 않도록 기원하는 데 있었습니다.
얼음 저장과 사용 관련 의례들
사한제는 얼음 관리의 주요 시점에 맞춰 여러 형태로 나뉘어 지내졌습니다.
- 장빙제(藏氷祭): 음력 12월경 강이나 호수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빙고에 저장할 때 지내는 제사입니다. 겨울철 충분한 얼음이 얼도록 추위를 빌고, 채취 및 저장 과정의 안전과 성공을 기원했습니다.
- 개빙제(開氷祭): 이듬해 봄 춘분(春分) 무렵, 겨울 동안 저장했던 얼음 창고인 빙고의 문을 열고 얼음을 사용하기 시작할 때 지내는 제사입니다. 얼음을 안전하게 잘 사용하고 한 해 동안 재앙이 없기를 기원했습니다.
- 기한제(祈寒祭) 또는 동빙제(凍氷祭): 겨울인데도 날씨가 충분히 춥지 않아 얼음이 제대로 얼지 않을 때, 나라의 얼음 확보를 위해 추위가 오기를 기원하며 지내는 제사입니다.
이러한 제사들을 통틀어 사한제라고 불렀으며,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 의례 체계에서 소사(小祀), 즉 비교적 작은 규모의 제사로 분류되어 행해졌습니다.
국가의 소사(小祀)로서의 위상
사한제는 국가의 중요한 의례 중 하나였지만, 종묘사직이나 하늘에 지내는 대사(大祀)나 중사(中祀)보다는 낮은 단계인 소사로 분류되었습니다. 이는 사한제가 나라의 근본이나 백성 전체의 생존보다는 특정 자원(얼음)의 관리와 관련된 의례였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국가의 운영과 백성의 편의를 위해 필수적인 자원을 관리하는 데 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반영된 중요한 의례였습니다.
사한제의 유래: 중국 문헌 속 기록
사한제의 기원은 우리나라 자체에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중국의 오랜 전통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국의 여러 고대 문헌에 겨울 얼음 채취와 관련된 제사 기록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 『시경(詩經)』: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의 '칠월(七月)' 시에는 음력 12월(이양)에 얼음을 깨어 음력 1월(삼양)에 빙고에 넣고, 음력 2월(사양) 아침에 염소와 부추를 바쳐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주례(周禮)』: 고대 중국의 예법을 기록한 『주례』에도 12월에 얼음을 잘라 저장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 『예기(禮記)』: 중국의 또 다른 예법서인 『예기』의 '월령' 편에는 춘분에 어린 양을 바치고 얼음 창고(빙실)를 열어 얼음을 꺼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중국 문헌들의 기록을 통해 겨울 얼음 관리와 관련된 제사가 중국에서 매우 오래전부터 행해졌으며, 이러한 전통이 우리나라에 전해져 사한제로 정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한제의 역사와 변천
우리나라에서 겨울철 얼음을 채취하고 저장했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사한제와 같은 국가 의례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삼국시대: 얼음 저장의 시작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 지증마립간 6년(505년) 겨울 11월에 처음으로 해당 관서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신라에는 빙고전(氷庫典)이라는 얼음 창고 관리 관청도 두었으나, 당시 사한제를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고려시대 사한제 기록과 내용
사한제에 대한 구체적인 문헌 기록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등장합니다. 『고려사(고려사)』 「길례소사(吉禮小祀)」 사한조(司寒條)에 따르면, 고려에서는 맹동(孟冬, 음력 10월)과 입춘(立春)에 얼음을 저장할 때와 춘분(春分)에 얼음을 꺼낼 때 사한제를 지냈습니다. 제사에는 희생으로 돼지 한 마리를 바쳤습니다. 또한 제삿날에는 담당 관청인 상림령(上林令)이 복숭아나무로 만든 활과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을 빙실(얼음 창고) 안에 마련해두었다가 제사가 끝난 뒤에도 그대로 두었습니다. 활과 화살이 재앙을 없애주는 벽사(벽사)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주술적인 행위였습니다.
조선시대 사한제의 정립과 폐지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예를 따라 사한제를 국가 의례로 지냈습니다. 사한단은 주로 얼음 창고인 동빙고(동빙고) 근처에 있었습니다. 『용재총화(慵재총화)』에는 사한단에서 얼음을 저장할 때 날씨가 추워지기를 제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경지략(한경지략)』에는 12월에 사한단에서 현명씨에게 제사를 드린 후에야 한강에서 얼음을 뜨기 시작했고, 춘분에 개빙제를 드린 후에 얼음을 나누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는 사한제를 고려의 예에 따라 국가 소사로 정식으로 편입시켰습니다. 처음에는 얼음 저장 시기(매양 11월)와 제사 시기(12월 월령)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어, 세종 30년(1448년)에는 기후 변화를 고려하여 얼음이 얼어 저장할 수 있는 시기가 오면 택일하여 장빙제를 지내도록 하되, 공식적인 장빙제 시기는 12월로 정했습니다. 사한제는 주로 3품 이상의 관원이 주관했으며, 19세기 말까지 이어지다가 순종 2년(1908년) 칙령에 의해 국가 의례에서 폐지되었습니다.
사한제가 지닌 실용적 의미와 자연에 대한 염원
사한제는 단순히 옛 기록에만 남은 의미 없는 의례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실용적인 목적과 더불어 자연의 순리에 대한 깊은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 실용적 목적: 사한제는 한 해 사용할 얼음의 충분한 확보와 안전한 보관을 기원하는 의례였습니다. 얼음은 여름철 식재료 보관, 환자 치료, 제사, 연회 등 국가와 백성의 생활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었기에, 이를 관장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으로 여겨졌습니다.
- 자연에 대한 염원: 사한제의 더 깊은 의미는 바로 자연의 법칙이 어긋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이었습니다. 즉, 여름은 마땅히 덥고 겨울은 마땅히 추워야 자연의 순리가 유지된다고 믿었습니다. 충분히 추워야 얼음이 잘 얼고, 그래야 더운 여름을 잘 날 수 있었습니다. 사한제는 이러한 자연의 조화와 계절의 순환이 질서 있게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혹시 모를 자연의 이변(따뜻한 겨울 등)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려는 의례이기도 했습니다. 추위의 신인 현명씨에게 기한제를 지내며 추위를 빌었던 풍습은 이러한 염원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사한제는 국가적인 얼음 관리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자, 자연의 질서 속에서 삶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했던 우리 조상들의 세계관이 담긴 흥미로운 전통 의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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