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지면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스물네 절기 가운데 열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한로(寒露)입니다. 한로는 이름 그대로 '차가운 이슬(寒露)'이 맺히기 시작하는 시기를 뜻하는 절기입니다. 가을의 절정에서 겨울 채비를 알리는 한로 무렵의 자연 변화와 우리 조상들의 생활 풍습, 그리고 이 절기가 지닌 의미를 자세히 살펴봅니다.
한로(寒露)란 무엇인가?
한로는 24절기 중에서 백로(白露)와 추분(秋分) 다음에 오며, 상강(霜降) 앞에 위치하는 가을 절기입니다. 태양의 황경(黃經)이 195도가 되는 때로, 양력으로는 보통 10월 8일 또는 9일경에 해당합니다. 음력으로는 대략 9월에 들며, 이 시기부터는 공기가 차츰 선선해지고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찬 공기를 만나 서리(霜)가 내리기 직전, 차갑게 이슬(露)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한로 무렵의 자연과 농사의 변화
한로 절기는 자연의 변화가 더욱 뚜렷해지고, 농촌에서는 바쁜 수확 작업이 한창인 시기입니다.
서늘해지는 공기와 찬 이슬
한로 무렵이 되면 낮에는 아직 가을 햇살이 따뜻할 수 있지만, 아침저녁으로는 확연히 서늘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밤 기온이 크게 떨어지면서 풀잎이나 나뭇가지에 맺히는 이슬이 차가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이슬은 기온이 더 내려가면 곧 서리로 변하게 되는데, 한로는 바로 그 직전의 시점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가을 걷이와 농사의 중요 시기
전통 농경 사회에서 한로는 매우 중요한 농사 절기였습니다. 찬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서리가 내릴 날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하며, 서리가 내리기 전에 오곡백과의 추수를 서둘러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 농촌에서는 타작 소리가 분주하게 울려 퍼지며 한 해 농사의 결실을 거두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계절을 알리는 새들의 이동
한로 무렵은 여름철 우리나라에서 번식했던 새들이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고, 겨울을 나기 위해 북쪽에서 날아오는 겨울새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시기입니다. 대표적으로 여름새인 제비는 한로가 지나면 강남으로 떠난다는 속담이 있으며, 기러기와 같은 겨울새들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새들의 이러한 이동은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자연의 신호가 됩니다.
깊어가는 가을 풍경
기온이 낮아지면서 산과 들의 단풍은 더욱 짙어지고 아름다움을 더합니다. 또한 가을을 상징하는 꽃인 국화가 노랗게 피어 가을의 정취를 더하며, 갈대나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선사합니다.
한로와 관련된 풍습과 시절음식
한로는 설날이나 추석처럼 큰 명절은 아니었지만, 깊어가는 가을과 관련된 몇 가지 풍습과 이 시기에 즐겨 먹었던 시절음식이 있습니다.
중양절과 유사한 풍습
한로는 음력 9월 9일인 중양절(重陽節)과 시기적으로 비슷하게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양절의 풍습 중에는 산에 올라 수유(茱萸) 열매를 머리에 꽂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 고향을 바라보며 시를 짓는 '고향 바라보기' 등이 있는데, 이러한 풍습이 한로 무렵에도 행해지기도 했습니다. 수유 열매는 붉은색을 띠는데, 옛 사람들은 붉은색이 악귀를 쫓는 벽사력(辟邪力)이 있다고 믿어 잡귀를 물리치기 위해 머리에 꽂았습니다.
서민들이 즐겼던 시절음식: 추어탕
한로와 상강(霜降) 무렵, 서민들은 시식(時食)으로 추어탕(鰍魚湯)을 즐겨 먹었습니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미꾸라지(鰍魚)가 양기(陽氣)를 돋우는 데 좋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꾸라지 추(鰍)'자에 '물고기 어(魚)'자를 써서 추어라고 부르는 것은, 살이 누렇게 찌는 가을에 잡히는 물고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여겨집니다. 가을 추수를 앞두고 기력을 보충하고 다가올 추위를 대비하기 위해 추어탕과 같이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절기 한로가 지닌 의미
한로와 같은 24절기는 농경 사회에서 우리 조상들이 자연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농사 시기를 결정하는 데 매우 유용한 기준이었습니다.
정확한 농사를 위한 절기의 중요성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음력은 윤달이 있어 날짜가 계절과 한 달 정도 차이 날 수 있는 반면, 태양력을 기반으로 한 24절기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 정해지므로 매년 거의 같은 날짜에 들어 계절의 변화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줍니다. 이는 농작물의 씨 뿌리고 키우며 거두는 시기를 정하는 데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역법은 순수한 음력이 아닌, 태양의 움직임을 함께 고려한 태음태양력이었습니다.
'철을 안다'는 의미와 절기 한로
24절기를 잘 아는 것은 곧 농사에 필요한 자연의 이치를 안다는 의미였으며, 이를 '철을 안다'고 표현했습니다. '철이 났다'는 말은 소년이 성장하여 성인이 되고, 농사일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숙련된 농부가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한로는 입추, 처서, 백로, 추분, 상강과 함께 가을 절기에 해당하며, 명절이라기보다는 이러한 기후 변화를 읽는 중요한 지표로서 활용되었습니다.
한로와 관련된 속담들
한로와 관련된 속담은 이 절기의 특징과 농사 시기를 잘 보여줍니다.
- "한로가 지나면 제비도 강남으로 간다."
한로가 지나 기온이 더 떨어지기 전에 제비가 따뜻한 곳으로 이동한다는 의미로, 이 시기가 가을의 끝자락이며 겨울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속담입니다. - "가을 곡식은 찬이슬에 영근다."
가을에 내리는 찬 이슬을 맞으며 곡식이 더욱 단단하고 충실하게 익는다는 의미입니다. 한로 무렵의 서늘한 기온이 농작물의 수확량을 늘리고 품질을 좋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농사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한로는 차가운 이슬이 맺히는 계절적 변화를 알리는 절기이자, 농사의 마무리를 독려하고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게 하는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삶을 영위했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부지런함이 깃든 절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풍습'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의 끝자락, 서리가 내리는 절기 상강(霜降) (0) | 2025.04.23 |
---|---|
정초 한 해 운수를 점치는 '토정비결(土亭秘訣)' 풍습 (0) | 2025.04.23 |
정초 한 해 운수를 점치는 토정비결(土亭秘訣) 풍습 (0) | 2025.04.22 |
겨울 얼음 보관과 계절의 순환을 기원한 국가 의례: 사한제(司寒祭) (0) | 2025.04.22 |
한 해 건강 기원하는 정월 대보름 풍습, '부럼깨기' (0) | 2025.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