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날 아침, 우리 조상들은 독특한 풍습을 행하며 한 해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했습니다. 바로 '부럼깨기'인데요. 딱딱한 견과류를 어금니로 깨물며 1년 내내 부스럼이 나지 않고 이(齒)를 튼튼하게 해달라고 빌었던 이 풍습은 대보름의 대표적인 속신(俗信) 중 하나입니다. 부럼깨기의 유래부터 구체적인 방법, 그리고 이 풍습에 담긴 깊은 의미까지 자세히 알아봅니다.
정월 대보름 '부럼깨기'란?
부럼깨기는 정월 대보름날 아침 일찍, 다른 음식을 먹기 전에 날밤, 호두, 은행, 잣 등 껍질이 단단한 견과류를 자신의 어금니로 힘주어 깨무는 풍습을 말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해에 피부에 나는 각종 부스럼이나 종기를 예방하고, 치아를 튼튼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풍습은 단순히 '부럼을 깨는 행위'를 넘어, 사용되는 견과류 자체나 행위 자체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러한 견과류를 통틀어 부럼 또는 부름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행위는 부스럼깨물기, 부럼깨물기, 부럼먹는다 등으로 일컬어졌습니다.
부럼깨기의 다양한 이름들
부럼깨기는 문헌 기록에 따라 여러 한자어 용어로도 표기되었습니다. 이는 풍습의 오랜 역사와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 작절(嚼癤): 부스럼(절)을 깨문다(작)는 뜻입니다. 『경도잡지(京都雜志)』,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에 나타납니다.
- 고치지방(固齒之方): 이를 튼튼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동국세시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양뇌아(養牢牙): 튼튼한 어금니를 기른다는 뜻으로, 『담정유고(藫庭遺藁)』에 나옵니다.
- 작옹(嚼癰): 종기(옹)를 깨문다(작)는 뜻으로, 『세시풍요(歲時風謠)』에 사용되었습니다.
- 종과(腫果), 소종과(消腫果): 부스럼을 예방하거나 가라앉히는 열매라는 뜻으로, 사용된 견과류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 교창과(咬瘡果): 부스럼(창)을 깨무는(교) 열매라는 뜻으로,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표기되어 있습니다.
'부럼깨기'의 유래: 이 굳히기에서 부스럼 예방까지
부럼깨기 풍습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의 여러 세시기(歲時記)나 죽지사(竹枝詞) 기록에 광범위하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서 널리 행해져 온 민속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를 튼튼하게 하려던 주술적 시작
부럼깨기는 원래 피부병 예방 목적보다 이를 튼튼하게 하려는 주술적 목적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딱딱한 것을 깨무는 행위 자체가 치아를 단련한다는 물리적인 의미와 함께, 강하고 단단한 것에 자신의 치아의 힘을 투영하여 더욱 강해지기를 바라는 주술적인 염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동국세시기』에는 의주(義州) 지역에서 젊은 남녀들이 정월 대보름 새벽에 딱딱한 엿을 깨물며 치교(齒交), 즉 '이 내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누가 이가 더 튼튼한지 겨루는 이러한 행위는 이 굳히기의 의미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대보름에 고기산적을 만들어 먹는 것을 '이 굳히기 산적(固齒炙)'이라고 불렀던 것도 같은 맥락의 풍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담정유고』에 실린 "호두와 밤이 어금니를 단단하게 하니, 오이처럼 부드럽게 부스럼을 깨무네."라는 시구는 이처럼 이를 단단하게 한다는 관념이 오랫동안 지속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부스럼 예방의 의미 추가와 대중화
시간이 흐르면서 부럼깨기의 의미는 피부병, 특히 부스럼이나 종기를 예방하는 것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과거에 피부병이나 전염병이 흔하고 위험했던 현실적인 경험이 반영된 결과일 것입니다. 딱딱한 껍질을 깨뜨리는 행위가 단단한 혹이나 부스럼을 '깬다'는 유감주술적 사고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해동죽지(海東竹枝)』 기록에 따르면, 정월 대보름날 호두와 잣을 깨물어 부스럼을 예방하는 풍습은 일반 백성들은 물론 궁중에서도 임금의 외척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성행했다고 합니다. 밤에는 저잣거리에서 불을 켜 놓고 부럼을 팔았으며, 집집마다 사갈 정도로 큰 유행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부럼깨기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회 전반에 걸쳐 대중적인 세시풍습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럼깨기, 어떻게 했을까?
부럼깨기는 비교적 간단하지만 몇 가지 정해진 방식이 있었습니다.
사용했던 견과류와 준비
부럼깨기에는 껍질이 딱딱한 견과류를 사용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날밤, 호두, 은행, 잣, 땅콩 등입니다. 지역이나 형편에 따라 이 중 한두 가지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여러 종류를 함께 준비하여 식구들이 원하는 것을 골라 깨물도록 했습니다. 때로는 딱딱한 견과류 대신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무를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각 가정에서는 대보름 전날 미리 부럼으로 사용할 견과류를 깨끗이 씻어 준비해 두었습니다.
깨무는 방법과 주언
대보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혹은 세배가 끝난 후에 다른 음식을 먹기 전에 부럼을 깨물었습니다. 부럼은 손으로 잡고 어금니로 힘주어 단번에 깨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깨물면서는 큰 소리로 "부럼 깨물자!"라고 외치거나, "올 한 해 무사태평하고 부스럼 안 나게 해줍소사"와 같은 주언(呪言)이나 한 해의 평안을 비는 축원사를 함께 외쳤습니다.
자신의 나이 수대로 부럼을 깨물기도 했지만, 보통은 두세 번 정도만 거듭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모든 부스럼을 깨뜨리고자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 부럼과 먹는 방법
부럼깨기를 할 때 처음 깨문 부럼은 마당이나 지붕 위에 던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는 악귀나 질병을 물리치거나, 새해의 복을 불러온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처음 깨문 것 이후의 부럼은 버리지 않고 껍질을 까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견과류는 영양가가 높아 겨우내 부족했던 영양을 보충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다른 나라의 유사 풍습
딱딱한 것을 깨물어 이를 튼튼하게 하거나 나쁜 기운을 물리치려는 풍습은 우리나라 외에도 다른 동아시아 국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 중국: 중국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따르면, 설날 아침에 도소주(屠蘇酒)와 함께 교아당(膠牙餳)이라는 엿기름으로 만든 엿을 올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엿을 깨무는 행위는 우리나라 의주 지역의 엿 깨물기 풍습처럼 이를 튼튼하게 하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 일본: 일본에서도 정초에 '하가타메(齒固め)'라는 '이 강하게 하기' 풍습이 있었습니다. 조정에서나 민간에서나 떡이나 딱딱한 음식을 먹으며 치아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했습니다.
이처럼 딱딱한 음식을 깨물어 복을 빌고 건강을 기원하는 행위는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주술적 사고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럼깨기의 깊은 의미
정월 대보름의 부럼깨기 풍습은 단순히 견과류를 먹는 행위를 넘어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본래는 딱딱한 것을 깨무는 행위를 통해 치아를 튼튼하게 만들려는 원초적인 주술적 사고에서 출발했습니다. 여기에 종기와 같은 피부병이나 전염병의 현실적인 위험을 막으려는 염원이 더해져 '부스럼 깨물기'라는 의미가 강화되었습니다.
나아가 새해 첫 보름날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의 특징에 따라, 부럼을 깨는 행위와 함께 한 해 동안의 무사태평과 안녕을 기원하는 축원성이 더해졌습니다. 악귀와 질병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들이려는 주술적인 행위와 새해의 소망을 비는 축원성이 결합되어, 부럼깨기는 한국 고유의 독특하고 의미 있는 대보름 풍습으로 정착되었습니다.
이는 자연의 변화에 맞춰 한 해를 시작하고 마무리했던 우리 조상들이 건강과 평안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주는 소중한 문화적 기록입니다.
참고문헌
崔南善. 朝鮮常識問答-全篇. 東明社, 1946년
한국민속대사전1. 민족문화사, 1991년
韓國民俗綜合調査報告書-慶尙南道 編, 1976년
京都雜志, 藫庭遺藁, 東國歲時記, 歲時風謠, 洌陽歲時記, 海東竹枝, 荊楚歲時記
洪錫謨 編箸·秦京煥 譯註. 서울·세시·한시. 보고사,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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