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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의 한가운데, 밤 기온이 급격히 낮아지면서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시기를 알리는 절기가 있습니다. 바로 스물네 절기 중 열여덟 번째에 해당하는 상강(霜降)입니다. 이름 그대로 '서리 상(霜)'에 '내릴 강(降)'자를 쓰는 상강은 가을의 쾌청함 속에 다가오는 겨울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절기입니다. 상강 무렵의 자연 변화와 함께했던 풍습, 그리고 이 절기가 지닌 의미를 자세히 살펴봅니다.

상강(霜降)이란 무엇인가?

상강은 24절기 중 한로(寒露)입동(立冬) 사이에 드는 절기입니다. 태양의 황경(黃經)이 210도에 이르는 때로, 양력으로는 보통 10월 23일경에 해당합니다. 가을의 맑고 청명한 날씨가 이어지지만, 밤이 길어지고 기온이 큰 폭으로 떨어지면서 마침내 대기 중의 수증기가 땅에 엉겨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시기입니다. 때로는 기온이 더 낮아져 첫 얼음이 얼기도 합니다.

상강 무렵의 자연과 계절 변화

상강 절기는 가을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달하면서도 동시에 겨울이 멀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하는 시기입니다.

서리와 첫 얼음

상강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서리가 내리는 것입니다. 밤사이 기온이 영하 가까이 떨어지면 풀잎이나 나뭇잎에 하얗게 서리가 맺힙니다. 서리가 내린다는 것은 작물에게는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자연은 숙연해지며 새로운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신호가 됩니다. 기온이 더 내려가면 연못가 등에 얇게 첫 얼음이 얼기도 하여 완연한 가을의 끝자락임을 느끼게 합니다.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 단풍과 국화

상강 무렵은 산과 들의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절정을 이루는 시기입니다. 울긋불긋 물든 단풍은 가을의 깊이를 더하며 사람들의 발길을 산으로 이끕니다. 또한 가을을 상징하는 꽃인 국화도 이 시기에 활짝 피어 은은한 향기를 더합니다. 중구일(重九日, 음력 9월 9일)과 마찬가지로 상강 무렵에 국화주를 마시며 가을 나들이를 즐기는 풍습은 이러한 계절적인 아름다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상강과 관련된 풍습과 의미

상강은 자연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며 생활했던 우리 조상들의 풍습과도 연결됩니다.

가을을 만끽하는 풍속

아름다운 가을 풍경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을 즐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국화주를 마시거나 국화차를 즐기며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산과 들로 가을 나들이를 떠나 절정에 달한 단풍을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농사의 마무리와 겨울맞이

농경 사회였던 과거에는 상강이 농사력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이 시기는 가을 추수가 거의 마무리되는 때입니다. 늦게까지 자란 작물들도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더 이상 자라기 어렵기 때문에 서리가 내리기 전에 추수를 끝내야 했습니다. 또한 추수를 마치고 나면 다가올 긴 겨울을 대비하여 월동 준비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국가 의례: 둑제

조선시대에는 상강에 국가적인 의례인 둑제(纛祭)를 행하기도 했습니다. 둑제는 전염병이나 재앙을 막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로, 계절에 따라 정해진 시기에 올렸는데 상강이 그중 한 시점이었습니다. 이는 상강 무렵의 기온 변화가 질병과 관련이 있다고 여겼거나,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며 다음 해의 풍요와 무사함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자연의 변화를 읽는 지혜: 삼후(三候)

고대 중국에서는 24절기를 각 절기마다 5일씩 세 개의 기간, 즉 삼후(三候)로 나누어 해당 시기에 나타나는 자연의 변화를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삼후 개념은 우리나라에도 전해져 문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삼후 구분

상강의 삼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 초후(初候): 승냥이(이리)가 산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때입니다. (실제로 승냥이가 겨울을 앞두고 사냥한 먹이를 모아두는 습성을 두고 의례에 비유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 중후(中候): 초목(풀과 나무)이 누렇게 변하고 잎이 떨어지는 때입니다.
  • 말후(末候): 겨울잠을 자는 벌레들이 모두 땅속으로 숨는 때입니다.

우리 문헌 속 상강 삼후

우리나라 문헌에서도 상강의 삼후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김형수(金逈洙)의 '농가십이월속시(農家十二月俗詩)'에는 한로와 상강 무렵의 자연 모습을 묘사하며 "초목은 잎이 지고 국화 향기 퍼지며 승냥이는 제사하고 동면할 벌레는 굽히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중국의 삼후 구분이 우리 절기 풍습 이해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줍니다.

문학으로 만나는 상강

상강 무렵의 서늘하고 숙연해지는 가을의 분위기는 문학 작품 속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권문해(權文海)의 『초간선생문집(草澗先生文集)』에는 상강의 정경을 묘사한 시가 실려 있습니다.

 

반야엄상편팔굉(半夜嚴霜遍八紘) 한밤중에 된서리가 팔방에 두루 내리니,
숙연천지일번청(肅然天地一番淸) 숙연히 천지가 한번 깨끗해지네.
망중점각산용수(望中漸覺山容瘦) 바라보는 가운데 점점 산 모양이 파리해 보이고,
운외초경안진횡(雲外初驚雁陳橫) 구름 끝에 처음 놀란 기러기가 나란히 가로질러 가네.
잔류계변조병엽(殘柳溪邊凋病葉) 시냇가의 쇠잔한 버들은 잎에 병이 들어 시드는데,
로총리하찬한영(露叢籬下燦寒英) 울타리 아래에 이슬이 내려 찬 꽃부리가 빛나네.
각수노포추귀진(却愁老圃秋歸盡) 도리어 근심이 되는 것은 늙은 밭주인이 가을이 다 가면,
시향서풍세파굉(時向西風洗破觥) 때로 서풍을 향해 깨진 술잔을 씻는 것이라네.

 

이 시는 상강의 밤, 서리가 내려 천지가 맑아지는 모습과 가을의 쇠락하는 풍경, 그리고 겨울을 맞이하는 농부의 심경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상강은 가을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동시에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게 하는 절기입니다. 서늘해진 공기 속에서 자연의 변화를 느끼고, 한 해의 농사를 갈무리하며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채비를 하던 우리 조상들의 삶의 지혜가 깃들어 있습니다.

 

참고문헌
조선대세시기Ⅰ, 2003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1, 1991년
한국세시풍속자료집성-조선전기 문집 편,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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