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륙 [雙六]은 정초나 겨울철에 즐기던 한국의 전통 주사위 놀이입니다. 쌍륙판과 말, 주사위를 사용하여 승부를 겨루는 이 유서 깊은 놀이의 역사와 규칙, 그리고 문화적 의미를 자세히 알아봅니다.
쌍륙이란?
쌍륙은 정초나 겨울철에 주로 즐겼던 한국의 전통 보드게임입니다. 쌍륙판(말판) 위에서 서른 개의 말(각자 15개)과 두 개의 주사위(骰子)를 가지고 두 사람이 승부를 겨루는 놀이입니다. 대한제국 말기까지 널리 행해졌던 기록이 있으며, 단순히 운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인 판단과 말의 운용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쌍륙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악삭(握槊), 쌍륙(雙陸), 상륙(象陸 - 이두식 표기), 상육(象陸) 등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악삭'이라는 이름은 길게 깎은 나무(주사위 대용)를 손에 쥐고 놀았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명절이나 추운 겨울철 실내에서 가족 또는 친구와 함께 즐기기에 좋은 놀이였습니다.
오래된 역사를 가진 놀이
쌍륙은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되었으며, 동양과 서양 여러 문화권에서 유사한 형태의 놀이가 발견됩니다.
세계적인 기원
쌍륙과 유사한 형태의 놀이판은 이미 고대 바빌로니아, 이집트, 인도, 그리스, 로마 제국 등의 유적지에서 발굴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바빌로니아 아브라함 성지에서 발견된 기원전 3,000년경의 놀이판입니다. 이는 쌍륙의 조상 격인 놀이가 인류 역사 초창기부터 존재했음을 보여줍니다.
중국 및 동아시아 전래
중국에 쌍륙이 전해진 것은 남북조 시대에 고대 인도를 통해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잡조(五雜俎)』나 『보쌍(譜雙)』과 같은 문헌에는 쌍륙과 관련된 고사들이 전해지고 있으며,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에는 크게 유행하여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중국에서는 쌍륙 외에도 쌍록(雙鹿), 박륙(博陸), 파라새희(波羅塞戱), 악소(握塑), 십이기(十二棊), 선채(選采), 육갑(六甲), 육채(六采) 등 매우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쌍륙 형태의 놀이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쌍륙
우리나라에 쌍륙이 전래된 시기는 삼국시대 무렵 또는 그 이전으로 추정됩니다. 당나라 학자 이연수가 편찬한 『북사(北史)』 권94 「백제전(百濟傳)」에 백제에서 투호, 저포, 농주와 함께 악삭(握槊)을 포함한 다양한 잡희(雜戱)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쌍륙이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한반도에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 이후의 문헌에서는 쌍륙에 대한 기록이 다수 등장합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시에서도 쌍륙놀이가 언급되는 등 고려시대에도 이미 보편적인 놀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쌍륙은 더욱 널리 퍼져 다양한 문헌에 기록되었습니다. 『조선부(朝鮮賦)』, 『견한잡록(遣閑雜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록)』,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성호사설(星湖僿說)』, 『재물보(才物譜)』 등 수많은 기록에서 쌍륙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신윤복이나 김준근과 같은 유명 화가들의 풍속화에도 쌍륙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 당시 민간에서 얼마나 사랑받았던 놀이인지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쌍륙, 어떻게 즐길까?
쌍륙은 쌍륙판, 말, 주사위를 이용하여 진행됩니다. 놀이에 사용되는 도구와 기본적인 규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쌍륙판과 말, 주사위
- 쌍륙판: 일반적으로 가로 약 80cm, 세로 약 40cm 내외의 직사각형 형태입니다. 판 가장자리에 턱이 있는 것과 없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판 위에는 검은 선으로 24개의 '밭'[田]이 그려져 있으며, 가운데에는 쫓겨난 말이 잠시 머무는 큰 칸 두 개가 있습니다. 밭은 안쪽의 '안육'[內陸]과 바깥쪽의 '바깥육'[外陸]으로 나뉩니다. 말의 이동 방향은 일반적으로 상대편의 안육에서 자신의 안육 방향으로 일방통행합니다.
- 말: 각자 15개씩, 총 30개의 말을 사용합니다. 말의 모양은 원반에 기다란 추가 달린 형태로, 가운데 선을 그어 위아래 색깔을 다르게 칠해 자기 말과 상대방 말을 구분합니다. 주로 흑백 또는 청홍 색상을 사용했습니다.
- 주사위: 전형적인 쌍륙용 주사위는 약 1cm 크기의 정육면체로 상아나 동물의 뼈로 만들었습니다. 각 면의 눈은 대면(서로 마주 보는 면)의 합이 7이 되도록 배열되었습니다. 특히 호랑이뼈로 만든 주사위는 던지는 대로 원하는 눈이 나온다는 속설 때문에 선호되기도 했습니다.
쌍륙의 기본적인 규칙
쌍륙은 두 개의 주사위를 굴려 나온 눈의 합만큼 자신의 말을 전진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구체적인 규칙은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규칙을 따릅니다. (※ 아래 규칙은 알려진 내용 기반이며, 실제 전승된 규칙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말 배치: 놀이 시작 시 흑편과 백편의 말 15개씩을 정해진 형식에 따라 쌍륙판 위에 배치합니다. (배치 방법은 다양한 형태가 존재합니다.)
- 말 이동 (행마): 주사위 두 개를 굴려 나온 눈의 합만큼 말을 이동시킵니다. 예를 들어 2와 5가 나왔다면, 한 개의 말을 7칸 이동시키거나, 한 개의 말을 2칸, 다른 한 개의 말을 5칸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같은 숫자가 나온 경우 (예: 3, 3), 해당 눈의 두 배만큼 이동하거나 (3x2=6), 각 말에 3칸씩 이동시키는 등의 특별 규칙이 적용되기도 합니다.
- 밭의 제한: 한 밭에는 보통 다섯 개 이상의 말이 들어갈 수 없는 제한이 있습니다.
- 상대방 말 잡기: 상대방의 말이 한 개만 있는 밭(이를 바리라 부름)에 자신의 말을 옮겨 놓으면 상대방의 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잡힌 말은 놀이판 바깥으로 쫓겨나는데, 이를 귀향말이라 부릅니다.
- 귀향말 복귀: 귀향말이 있는 경우, 다른 말을 움직일 수 없으며 반드시 주사위 눈을 이용하여 귀향말을 놀이판 안으로 다시 들여와야 합니다. 귀향말은 보통 정해진 시작 지점부터 다시 출발합니다.
- 밭 점령: 상대방의 말이 두 개 이상 있는 밭에는 자신의 말을 옮겨 놓을 수 없습니다. 이 밭은 상대방이 '점령'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 말을 밖으로 내기 (Bearing off): 자신의 말들을 모두 자신의 안육에 모은 후에는 주사위 눈을 이용하여 말들을 놀이판 밖으로 내보낼 수 있습니다. 이때는 주사위 눈의 수보다 밭의 위치가 지나쳐도 말을 내보낼 수 있습니다.
- 휴식: 주사위를 던지지 않고 쉴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 후진 불가: 말은 항상 정해진 이동 방향으로만 전진하며, 뒤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주사위 눈과 용어
쌍륙에서 주사위 두 개를 던져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총 스물한 가지입니다. 각 주사위 눈에는 고유한 이름이 있으며, 두 눈의 조합에도 특별한 명칭이 사용됩니다.
- 각 눈의 명칭: 1은 백(白), 2는 아(亞), 3은 삼(三), 4는 사(四), 5는 오(五), 6은 육(六)이라고 부릅니다.
- 조합 명칭: 주사위 두 개의 눈이 (1, 2)처럼 다르게 나오면 순서대로 읽어 백아(白亞) 또는 아백(亞白)과 같이 부릅니다. (5, 6)은 오육(五六)이라고 합니다.
- 같은 눈 명칭: 같은 눈이 두 개 나오면 '중(重)'을 사용하여 중일(重一), 중아(重亞), 중오(重五), 중육(重六)이라고 합니다. 다만, (3, 3)과 (4, 4)는 특별히 '주(朱)'를 사용하여 주삼(朱三), 주사(朱四)라고 부릅니다.
- 별칭: (1, 1)은 빽빽이, (6, 6)은 육육 또는 줄륙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놀이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주사위 운에 기대기보다는, 나온 눈의 조합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의 말을 유리한 위치로 행마하고 상대방의 바리를 잡아 귀향말로 만드는 전략이 중요합니다.
쌍륙의 문화적 가치와 현재
쌍륙은 비록 외래에서 전래되었지만,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 조상들과 함께하며 한국 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놀이입니다.
우리 문화 속 쌍륙의 의미
특히 조선시대에는 왕실부터 양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쌍륙을 즐겼으며, 이는 당대의 문헌 기록과 풍속화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쌍륙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오락거리를 넘어, 명절이나 특별한 날 사람들이 모여 함께 즐기는 소통의 장 역할을 했습니다. 주사위의 우연성과 말 이동의 전략성이 결합되어 긴장감과 재미를 동시에 제공하며, 함께 놀이를 하는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세계의 유사한 놀이: 백개몬
쌍륙과 매우 유사한 형태의 놀이는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스코로쿠(雙六)'라는 이름으로 전래되어 주로 설날에 어린이들이 즐기는 놀이로 행해졌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서기 689년에 쌍륙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어, 7세기 중엽 우리나라를 통해 일본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오늘날 미국과 유럽에서 '백개몬(Backgammon)'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보드게임이 바로 쌍륙과 같은 계통의 놀이입니다. 백개몬은 나라마다 약간의 규칙 차이가 있었으나, 20세기 들어 국제적인 규칙이 정립되고 세계 선수권대회가 개최될 정도로 현대까지 활발하게 즐겨지고 있습니다. 백개몬의 역사를 볼 때, 쌍륙은 백개몬의 동아시아 버전이자 조상 격인 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쌍륙은 오랜 역사와 문화적 의미를 지닌 한국의 전통 놀이입니다. 비록 현대에는 백개몬에 비해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지만,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즐거움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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