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간장, 된장, 고추장은 한국 전통 발효 음식 문화의 근간입니다. 이 깊은 맛을 내는 장(醬)을 담그기 위한 필수 재료가 바로 메주입니다. 메주는 콩을 삶아 찧은 후 발효시켜 만드는 덩어리로, 단순히 장의 재료를 넘어 정성과 기다림이 담긴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입니다. 언제, 어떻게 메주를 만드는지, 그 복잡하고 세심한 메주쑤기 과정과 의미를 자세히 알아봅니다.
메주란 무엇이며 왜 만들까?
메주는 간장,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전통 장(醬)류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가장 기본적인 발효 재료입니다. 주원료인 콩(대두)을 삶거나 쪄서 으깬 뒤 일정한 형태의 덩어리로 만들고, 자연적으로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쳐 완성됩니다. 이 발효 과정에서 메주에 붙어 자라는 여러 미생물(주로 아스페르길루스 오리제와 같은 곰팡이, 바실러스균 등)이 콩의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분해하여 장 특유의 깊은 맛과 향을 만들어냅니다.
메주는 용도, 형태, 재료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습니다. 일반적인 명칭인 메주 외에도 말장(末醬), 밀조(密祖), 훈조(燻造), 장국(醬麴) 등으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장을 담그는 데 사용되므로 장메주라고도 하며, 특히 간장용 메주와 고추장용 메주는 만드는 방법이나 재료에 차이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했던 진장(眞醬)을 담그는 데는 절에서 만든 절메주를 사용했는데, 일반 집메주보다 크기가 크고 넓적한 형태였습니다. 삶은 콩을 찧어 떡처럼 빚은 것은 떡메주, 검정콩으로 만들면 검정콩 메주라 불렀습니다.
메주쑤기의 적기: 언제 만들까?
메주쑤기는 보통 한 해의 농사를 마무리하고 추위가 시작되는 늦가을부터 겨울철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시기는 음력 10월부터 12월 사이이며, 특히 입동(立冬, 음력 10월경) 무렵이나 가장 추운 때인 동짓달(음력 11월)에 쑤는 것이 좋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는 겨울철의 건조하고 낮은 온도가 메주를 잘 말리고 잡균의 번식을 막으면서 유익한 곰팡이가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의 종류나 지역에 따라 메주쑤는 시기는 조금씩 달랐습니다.
- 농가월령가(農家月령가) 11월령에서는 메주쑤기를 11월의 주요 일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 궁중에서 진장을 담그기 위한 절메주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음력 4월 무렵에 쑤기도 했습니다.
-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는 집메주는 전통적으로 음력 10월이나 동짓달에 많이 쑤었습니다.
- 고추장으로 유명한 순창 지역에서는 고추장메주를 여름철인 음력 8~9월, 특히 처서 무렵에 쑤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 지역별로 보면 서울, 경기, 경상, 제주에서는 음력 10월 무렵, 충청도에서는 음력 8월부터 10월 무렵, 전라도 구례나 무주에서는 음력 10월이나 동짓달에 쑤었고, 남원이나 평안도에서는 정월에 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메주쑤는 시기는 지역의 기후나 장 담그는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났지만, 공통적으로 장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습니다.
정성 가득한 메주쑤기 전통 과정
메주쑤기는 여러 단계를 거치는 복잡하고도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입니다. 일반적인 콩 메주(간장/된장용)를 만드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좋은 콩 고르고 불리기
가장 먼저 할 일은 좋은 콩을 고르는 것입니다. 장을 담그는 콩은 흔히 메주콩이라고 불리는 노란색 콩(백립종 품종, 예: 황금콩, 장엽, 태광)을 주로 사용합니다. 벌레 먹거나 썩은 콩, 모양이 좋지 않은 콩을 꼼꼼히 골라낸 후 깨끗한 물에 여러 번 씻어냅니다. 잘 씻은 콩은 충분한 물에 담가 하루 정도 불려놓습니다. 콩이 불면서 부피가 2~3배 가량 커지므로 넉넉한 크기의 용기를 사용해야 합니다.
콩 무르게 삶기
불린 콩은 이제 완전히 무르도록 푹 익혀야 합니다. 주로 무쇠 가마솥에 넣고 삶는데, 콩이 물에 잠기고도 23배 정도의 물을 넉넉히 붓습니다. 콩을 삶을 때 나는 특유의 비린내를 잡고 콩이 제대로 익게 하려면, 불에 올린 후 한소끔 끓어 넘치더라도 뚜껑을 자주 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줄여 뭉근하게 뜸을 들이듯 삶습니다. 민간에서는 보통 5시간에서 8시간까지 길게 삶았으며, 김이 오른 후 100도에서 34시간 이상 삶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콩이 제대로 익었는지 확인하려면, 삶은 콩을 손으로 비벼보아 반쪽으로 갈라지지 않고 아주 쉽게 뭉그러질 정도가 되거나, 콩의 노란색이 불그스름하거나 거무스름해질 때까지 삶아야 합니다. 콩이 충분히 잘 익어야 찧었을 때 끈기가 생겨 잘 뭉쳐지고, 메주 발효도 잘 되며, 최종적으로 장맛과 색깔이 좋아집니다. 덜 익으면 끈기가 없어 흩어지고 장맛이 떨어지며 색이 탁해지고, 지나치게 익어도 단백질 분해에 지장을 줄 수 있어 좋지 않습니다.
삶은 콩 찧고 모양 만들기
푹 삶은 콩은 식기 전에 소쿠리에 건져 물기를 빼고 뜨거울 때 찧어야 잘 으깨지고 뭉쳐집니다. 전통적으로는 절구에 넣고 나무 절굿공이로 끈기가 생기도록 빠르게 찧었습니다. 절구가 없을 때는 함지박 같은 큰 그릇에 놓고 찧거나, 포대에 담고 발로 밟아 으깨기도 했습니다.
충분히 으깨지고 끈기가 생긴 콩은 이제 메주 형태로 만듭니다. 메주의 크기는 보통 옛 단위로 콩 한 되 또는 두 되 분량으로 만들어 단단하게 빚었습니다. 요즘은 1~2kg 분량으로 작게 빚기도 합니다. 모양은 목침이나 납작한 전석처럼 네모난 각형(角形)으로 만들거나 둥근 원형으로 만들었습니다. 메주틀에 베보자기를 깔고 찧은 콩을 넣어 밟아 만들기도 했습니다. 너무 거칠게 찧어 알맹이가 겉돌거나, 식은 후에 찧으면 잘 뭉쳐지지 않습니다. 또한 메주 크기가 너무 크거나 두꺼우면 마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원치 않는 곰팡이가 생기기 쉬워 좋지 않습니다.
메주 말리고 띄우기
모양을 만든 메주는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적당한 간격을 두고 펼쳐놓아 겉말림을 합니다. 보통 하루 정도 지나 겉면이 만져보아 단단하고 꾸덕꾸덕해질 때까지 말립니다. 겉말림이 끝나면 새끼줄로 여러 덩이를 엮어 매달아 본격적으로 메주 띄우기, 즉 발효를 시킵니다. 메주는 통풍이 잘 되고 적절한 온습도가 유지되는 곳(예: 안방 아랫목 위 시렁, 주방의 시렁 등)에 매달아 약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띄웁니다. 이 과정에서 콩의 단백질과 지방이 분해되어 장맛의 기본 성분이 만들어지고 메주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나게 됩니다.
용도에 따른 메주 종류와 특징
메주는 장을 담그는 용도에 따라 주재료 구성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간장/된장용 메주
가장 기본적인 메주로, 오직 콩(대두)만을 사용하여 만듭니다. 앞서 설명한 과정대로 콩을 삶고 찧어 덩어리를 만들어 띄웁니다. 이 메주는 간장을 거르고 남은 건더기로 된장을 만들거나, 처음부터 된장용으로 만들어 막장 등을 담그는 데 사용됩니다.
고추장용 메주: 전분질 추가
고추장을 담그기 위한 메주는 간장/된장용 메주와 달리 콩 외에 쌀, 밀, 보리와 같은 전분질을 함께 사용하여 만듭니다. 보통 콩과 전분질의 비율은 콩 6 : 밀 4 또는 콩 5 : 찹쌀 2 정도가 일반적입니다.
고추장용 메주는 콩과 전분질(예: 찹쌀)을 함께 불렸다가 쪄낸 후 절구에 넣어 함께 찧어 만듭니다. 주먹만 한 크기로 동글납작하게 빚고, 가운데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가운데 구멍은 메주 속까지 고루 마르고 발효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모양을 만든 고추장메주 역시 겉말림을 한 후 새끼줄로 꿰어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매달아 띄웁니다. 순창 고추장메주는 가운데 구멍에 볏짚 줄을 꿰어 매달아 띄우기도 합니다.
메주쑤기와 관련된 속담
메주쑤기는 워낙 일상적인 일이면서도 정확한 과정과 정성이 중요했기에 이와 관련된 속담도 전해집니다.
-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 듣지 않는다."
아무리 확실한 사실이나 진실을 말해도 상대방이 전혀 믿지 않거나 의심이 많을 때 사용하는 속담입니다. 메주가 콩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명백한 사실인데도 그것조차 믿지 않는다는 과장된 표현을 통해 불신이 깊은 상황을 나타냅니다. -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 듣는다."
위 속담과 반대되는 경우로,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이 거짓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일지라도 무조건 믿는 상황을 뜻합니다. 메주는 콩으로 만드는 것이 상식인데, 팥으로 만든다는 말도 그대로 믿을 정도로 어리석거나 잘 속는 사람을 비유할 때 사용됩니다.
메주쑤기는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기술을 넘어, 한 해의 정성을 담아 가족의 건강과 식탁을 책임지려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부지런함, 그리고 기다림의 미학이 담겨 있는 소중한 전통 문화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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