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처용설화에서 유래하여 섣달그믐 나례에서 새해 액운을 쫓던 국가 의례이자 아름다운 벽사 가면무, 처용무를 소개합니다. 처용무의 역사, 오방처용무, 가면과 복식의 상징, 춤사위와 음악 등 민속 예술적 요소를 심층 분석합니다. 한국 전통춤과 신앙, 준학예사 시험 대비에 필수 정보입니다.
새해를 맞는 길목, 섣달그믐의 처용무
매년 음력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그믐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전통사회에서는 이 시기에 지난 한 해 동안 쌓인 불행과 액운을 털어내고 다가올 새해의 복을 기원하는 다양한 세시풍속이 행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국가적으로 역병이나 잡귀를 쫓아내고 평안을 기원했던 대규모 의례가 바로 나례(儺禮)이며, 이 나례에서 중요하게 연행되었던 벽사적인 춤이 바로 '처용무(處容舞)'입니다. 처용무는 신라 시대의 오래된 설화에서 유래하여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의례이자 궁중 예술로 발전한 독특한 형태의 가면무입니다. 현재는 그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습니다.
처용무란 무엇인가? 정의와 벽사의 의미
처용무는 처용(處容)이라는 인물의 가면을 쓰고 추는 춤으로, 그 핵심적인 목적은 잡귀나 역신(疫神, 질병을 퍼뜨리는 신)과 같은 나쁜 기운을 쫓아내고 좋은 기운을 불러들이는 '벽사(辟邪)' 또는 '축귀(逐鬼)'에 있습니다. 주로 섣달그믐날 밤에 행해졌던 나례 의식의 일부로 연행되었으며, 그 외에도 궁중이나 관아의 각종 연회 및 의례에서도 벽사 또는 축원의 의미로 추어졌습니다.
처용무는 역동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화려한 가면과 복식, 엄숙한 음악이 어우러지는 종합 예술의 성격을 지닙니다. 1971년 1월에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매년 처용문화제 등 다양한 기회를 통해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습니다.
처용무, 신라 처용설화에서 시작되다
처용무의 유래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편」에 실려 있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의 처용설화(處容說話)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설화에 따르면,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신라 경주에 와서 헌강왕을 돕는데, 어느 날 밤 늦게 집에 돌아오니 자신의 아내가 역신과 함께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용은 노하거나 화내는 대신, 그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처용의 당당하고 여유로운 모습에 감동한 역신은 무릎을 꿇고 사죄하며, 앞으로 처용의 얼굴을 그린 그림(화상)이 걸린 집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이 설화에서 역신을 물리치는 처용의 노래와 춤이 바로 처용무의 기원이 됩니다. 설화 속 처용은 역신조차 감화시키는 신비로운 능력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며, 당시 왕을 모시는 국무(國巫)의 성격을 지녔을 것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초기 처용무는 무당이 베푸는 굿 의식 속에서 역신을 쫓아내는 의식무(儀式舞) 형태로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민간에서는 설화의 내용처럼 처용의 특별한 능력을 믿고 그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문신(門神, 문에 붙여 잡귀를 막는 신)으로 삼아 집 문에 걸어두고 잡귀를 쫓는 풍습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처용설화는 처용무라는 공연 예술의 바탕이 된 동시에, 벽사를 위한 민간신앙의 대상으로도 자리 잡았습니다.
신라 무속 의례에서 조선 궁중 예술로: 처용무의 변천사
처용무는 신라 시대의 원초적인 무속 의례에서 시작하여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국가 의례이자 궁중 예술로 발전하며 형태와 성격이 변화해 왔습니다.
신라시대의 원형과 무속적 성격
신라시대 처용무의 원형은 처용설화에 기반한 1인 춤이었으며, 주로 역신을 쫓아내는 무속적인 의식무로서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수신(水神) 신앙이나 용(龍) 신앙과도 연관되며 부정을 없애는 원초적인 정화 의식의 성격을 지닌 탈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시대의 발전과 오락성의 가미
고려시대에 이르러 처용무는 점차 궁중 의례에 편입되고 상층 사회의 무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연말 나례(儺禮)에서 중요한 축귀 의식무로 행해졌으며, 그 외에도 산대잡희(山臺雜戱), 각종 연회, 중국 사신 접대 등의 자리에서도 연희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처용무는 단순한 의식무를 넘어 음악, 노래, 춤, 가면 등이 결합된 주술 종교적인 종합 가무극 형태로 발전했습니다. 『악학궤범』의 기록처럼, 고려시대 나례는 처용무뿐만 아니라 붉은 옷을 입은 동자들의 춤, 학무, 연화대, 심지어 불교적인 춤까지 포함하는 복합적인 형태였습니다.
한편, 고려 말기에는 처용무가 나례의 종교 의례적 성격과 더불어 점차 오락적인 성격이 강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목은 이색의 시 '구나행(驅儺行)'에는 역귀 쫓는 의식 다음에 처용무를 비롯하여 가면극, 인형극, 줄타기, 마술 등 다양한 산악잡희가 함께 연희되었다는 내용이 있어, 처용무가 연말 연회의 중요한 오락 요소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사』에는 충혜왕, 우왕 등 왕들이 직접 처용무를 추었다는 기록도 있어, 궁중 연회에서 처용무가 여흥(餘興)으로서도 인기가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조선시대의 정착과 양재처용 vs 관처용
조선시대에도 처용무는 국가 의례이자 궁중 무용으로 계승 발전했습니다. 특히 세종대에 이르러 1인이 추던 검은 탈의 처용무가 동서남북 중앙의 오방색(五方色) 복장을 한 다섯 명의 처용이 추는 오방처용무(五方處容舞)로 변화한 것은 처용무 변천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는 신라 불교의 오방신(五方神) 신앙과 고려시대에 유입된 중국 송나라의 오방춤의 영향을 받아 처용무가 우주론적인 상징성을 지닌 오방처용무 형태로 정착하게 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처용무의 성격을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중종실록』(1524년)에는 새해 정조(정월 초하루) 다례(茶禮, 차를 올리는 의례)에서 반드시 양재처용(禳災處容, 재앙을 물리치는 처용무)을 실시하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축귀적인 의식무로서의 성격이 강한 춤을 의미합니다. 이와 대비되는 관처용(觀處容, 보고 즐기는 처용무)은 오락적이고 예술적인 측면이 강조된 춤으로 구분되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조선시대에 처용무가 여전히 강력한 벽사 의례로서의 기능과 더불어, 감상하고 즐기는 공연 예술로서의 성격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양재처용의 비중이 더 컸다는 기록은 처용무의 근본적인 목적이 여전히 벽사에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처용무는 조선 왕조의례의 한 부분으로 전승되다가, 근대에 이르러 그 명맥이 위태로워졌으나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까지 보존 및 전승되고 있습니다.
민속 예술로서의 처용무: 가면, 복식, 음악, 춤사위
처용무는 가면, 복식, 음악, 춤사위 등 다양한 요소가 결합된 종합적인 민속 예술입니다. 각 요소에는 처용무가 지닌 벽사, 축원, 그리고 우주적인 상징성이 담겨 있습니다.
처용의 얼굴, 가면의 상징성
처용무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처용 가면입니다. 원래 검은색 탈이었던 처용 가면은 저포(모시)나 칠포(옻칠한 천) 껍질, 또는 유자나무 등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가로 약 30cm, 세로 약 45cm 정도로 실제 얼굴보다 크며, 긴 콧수염과 약간의 턱수염이 달려 있습니다. 『악학궤범』에 실린 처용탈 그림은 턱이 각지고 코가 큰 다소 이국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가면 위에는 대나무로 망을 짜서 만든 사모(紗帽)를 씁니다. 사모 좌우에는 부귀를 상징하는 붉은 모란(목단화)을 꽂고, 가운데에는 잡귀를 쫓고 신성성을 상징하는 복숭아 세 개와 복숭아나무 가지로 장식합니다. 귀에는 주석 귀걸이와 납 구슬을 달아 벽사의 의미를 더했습니다. 처용 가면은 단순히 인물을 흉내 내는 것을 넘어, 벽사의 힘을 지닌 신비로운 존재인 처용의 성격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그 위에 복과 벽사의 상징물을 더하여 의례적인 의미를 강화한 민속 예술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방색 비단 옷에 담긴 우주관
오방처용무에서 다섯 명의 처용이 입는 오방색(五方色) 비단 옷은 한국의 전통적인 우주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방색은 동(청색), 서(백색), 남(홍색), 북(흑색), 중앙(황색)을 의미하며, 우주의 방위와 오행(五行)의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춤을 추는 다섯 명의 처용은 이 오방색 비단 옷을 입고 각 방위를 상징하며, 우주의 질서를 바로잡고 사방의 잡귀를 물리치는 신성한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처용무 복식은 겉옷인 천의(天衣), 치마(裳), 바지(裙) 등으로 구성됩니다. 천의는 목에 감고 겉옷 위에 걸치는데, 녹색 비단에 덩굴꽃 문양을 그리고 안에는 홍색 명주를 사용했습니다. 치마는 주로 황색 비단으로 만들었고, 바지는 동북방은 홍색, 서남방은 흑색, 중앙은 남색 비단으로 만드는 등 방위에 따른 색 구분이 엄격했습니다. 이 외에도 긴 흰색 비단 소매인 한삼, 검은색 가죽 허리띠, 흰색 가죽신 등을 착용하여 처용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완성했습니다.
수제천과 함께 펼쳐지는 춤사위
처용무는 궁중 음악의 대표곡 중 하나인 수제천(壽齊天)을 비롯한 전통 음악의 반주에 맞춰 추어집니다. 수제천은 '하늘처럼 장수하소서'라는 뜻을 지닌 곡으로, 처용무의 벽사 및 축원 의미와 잘 어울립니다.
춤은 오방색 복장을 한 다섯 명의 처용이 청, 백, 홍, 흑, 황의 순서로 등장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들은 입장하여 좌측으로 돌아 북쪽을 향한 뒤 본격적인 춤을 시작합니다. 춤 중간에는 처용가(處容歌)를 부르는데, 이는 처용설화의 내용을 담고 있어 춤의 의미를 더합니다. 처용무의 춤사위는 매우 다양하고 역동적입니다. 무릎을 굽혔다 펴는 동작, 발과 다리를 이용해 방향을 전환하는 동작, 회전, 앞으로 나아가고 물러서는 동작, 허리와 팔을 이용한 표현 등이 특징입니다. 특히 다섯 명의 처용들이 마주 보거나 등을 지고, 혹은 색깔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나뉘어 움직이는 대무(對舞) 방식을 통해 다양한 구성을 만들어냅니다. 한삼을 휘날리며 크고 시원하게 움직이는 팔 동작과 발을 이용한 섬세한 동작이 조화를 이루며 처용의 신비롭고 힘찬 기운을 표현합니다.
『악학궤범』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처용무 공연에는 처용 다섯 명 외에 의물(각종 도구) 담당자 여섯 명, 그리고 마흔 명에 달하는 악사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공연이었습니다. 현재 전승되는 처용무는 처용 다섯 명과 악사 일곱 명으로 구성되어 예전에 비해 규모는 간소화되었으나, 춤과 음악, 복식의 핵심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민간 탈춤과의 비교와 차이
처용무는 가면을 쓰고 춤을 춘다는 점에서 한국의 민간 탈춤(예: 봉산탈춤, 하회별신굿탈놀이)과 유사한 부분이 있지만, 성격과 전승 양식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처용무는 궁중 의례를 중심으로 전승된 궁중 무용인 반면, 민간 탈춤은 마을 공동체의 신앙 의례(별신굿 등)나 장터의 유희, 풍자극으로 발전한 민속 연희입니다.
민간 탈춤에도 오방신장무, 사자춤 등 벽사적이고 의례적인 성격의 춤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형태나 춤사위, 음악 등은 처용무와는 다릅니다. 처용무는 국가 기관인 도화서의 화원이 가면을 만들고, 악학(음악 기관)에서 음악을 담당하며, 궁중 무희들이 춤을 추는 등 국가 주도의 체계 속에서 전승되었습니다. 반면 민간 탈춤은 지역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지역의 음악과 춤사위로 전승되어 왔습니다. 처용무는 기층 집단(일반 백성)의 탈춤 문화인 지역 가면극으로 직접적으로 전승되지 않았습니다.
처용무가 지닌 민속학적, 문화적 의미
처용무는 신라의 설화와 무속적 기원에서 출발하여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며 국가 의례와 궁중 예술로 발전한 한국 문화의 중요한 산물입니다. 처용무에는 한국인의 벽사 신앙, 우주관, 그리고 공연 예술의 전통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벽사(辟邪)와 축귀(逐鬼)의 상징성
처용무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벽사'와 '축귀'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섣달그믐이라는 시기는 한 해의 기운이 다하고 새로운 기운이 시작되는 '경계(境界)'의 시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때 경계가 약해져 잡귀나 액운이 쉽게 드나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처용무와 같은 강력한 벽사 의례를 통해 공간을 정화하고 악귀를 물리쳐 평안한 새해를 맞이하려 했습니다. 처용무는 단순한 춤이 아니라, 잡귀를 위협하고 쫓아내는 주술적인 힘을 지닌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국가 의례, 민속 신앙, 공연 예술의 복합체
처용무는 국가 주도의 의례(나례, 궁중 의례)의 한 부분으로 행해졌지만, 그 기원과 바탕은 민간 신앙(처용 설화, 무속, 벽사 신앙)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면, 복식, 음악, 춤사위 등 다양한 민속 예술적 요소를 통해 표현됩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은 처용무가 한국 문화의 여러 층위, 즉 궁중 문화, 민간 문화, 그리고 종교/신앙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된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엄격한 형식과 격식을 갖춘 국가 의례이면서도, 대중적인 설화 속 영웅과 벽사 신앙이라는 민간의 염원을 담고, 이를 화려하고 역동적인 공연 예술로 승화시킨 독특한 문화 콘텐츠입니다.
현대적 계승과 처용문화제
역사 속에서 주로 궁중 의례로 전승되던 처용무는 근대에 접어들며 단절될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과 국립국악원 등 기관의 전승 노력으로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습니다. 특히 처용설화의 배경지인 울산에서는 매년 '처용문화제'를 개최하여 처용제를 지내고 처용무를 공연하며, 설화와 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다양한 문화 행사를 통해 처용무의 정신을 계승하고 시민들에게 알리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전통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다시 살아나고 공유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민속학 연구와 준학예사 시험 대비를 위한 처용무 이해
처용무는 신라의 처용설화에서 시작되어 고려, 조선 시대 국가 의례 및 궁중 예술로 발전한 한국의 중요한 전통 가면무입니다. 섣달그믐 나례와 관련된 세시풍속으로서, 잡귀를 쫓는 민간신앙(속신)의 구체적인 표현으로서, 가면, 복식, 음악, 춤사위가 어우러진 민속 예술로서, 그리고 설화라는 구비문학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처용무는 민속학의 다양한 분야와 깊이 있게 연결됩니다.
민속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나 일반인들에게 처용무는 한국 전통사회에서 '벽사'와 '축귀'라는 신앙이 얼마나 중요했으며, 이것이 국가 의례와 공연 예술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사례입니다. 또한, 궁중 문화와 민간 문화가 상호작용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이기도 합니다.
특히 준학예사 자격시험의 선택과목인 '민속학'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처용무는 시험에 자주 출제될 수 있는 핵심 개념입니다. 처용설화, 나례와의 관계, 오방처용무로의 변화, 가면과 복식의 상징성, 벽사적 기능,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등 처용무와 관련된 주요 내용을 정확히 숙지하는 것이 시험 대비에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처용무는 역사를 넘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신비로운 아름다움과 함께, 어려운 시기에도 굴하지 않고 액운을 물리치며 새해의 평안을 기원했던 우리 조상들의 굳건한 정신을 전하고 있습니다. 처용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한국 전통문화의 풍요로움과 그 안에 담긴 선조들의 지혜를 느끼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