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늦가을에서 초겨울 무렵, 한국 가정에서는 큰 행사가 벌어집니다. 바로 한겨울 추위와 이듬해 봄까지 먹을 김치를 대량으로 담가두는 김장(沈藏)입니다. 김장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넘어, 가족과 이웃이 함께하며 공동체의 정을 나누고 혹독한 겨울을 대비하는 한국인의 삶의 지혜가 담긴 중요한 세시 풍습이자 문화 의례입니다. 우리 고유의 김장 문화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치며, 지역마다 어떤 특징을 가지는지, 그리고 어떻게 보관하는지 자세히 알아봅니다.
김장(沈藏)이란 무엇이며 왜 중요할까?
김장은 겨울부터 봄까지 장기간 먹기 위해 배추, 무 등 채소를 대량으로 절이고 양념하여 김치를 담가 저장하는 일을 말합니다. 보통 김장하기 좋은 시기는 겨울이 시작되는 입동(立冬) 전후이며, 기온이 너무 낮아 김치가 얼거나 너무 높아 쉽게 시어지지 않는 때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김장은 한국인에게 단순한 연례행사를 넘어섭니다. 과거 농경 사회에서는 겨울철 신선한 채소를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김장은 가족의 건강과 식량을 책임지는 매우 중요한 생존 방식이었습니다. 또한 온 가족과 이웃이 함께 모여 대규모 작업을 진행하며 품앗이 정신을 발휘하고 공동체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문화적 의미도 지녔습니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여름내 농사지어도 김장 없으면 못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김장(沈藏)'이라는 단어는 '채소를 소금물에 담가(沈) 겨울 동안 저장한다(藏)'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김치의 기본적인 보관 원리를 나타냅니다.
김장의 유구한 역사와 변천
김장 문화는 갑작스럽게 생긴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이어져 온 채소 가공 및 저장 기술이 시대 변화와 함께 발전해 온 결과입니다.
삼국시대 채소 가공 문화
김치의 기원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수서(隋書)』, 『북사(北史)』 등 중국 사서의 백제 기록에 따르면, 백제에서는 오곡과 함께 다양한 채소를 재배했으며, '화식(火食)하지 않는 것'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이는 불로 익히지 않고 채소를 발효시켜 먹는 냉식(冷食) 문화가 발달했음을 시사하며, 오늘날 김치의 원형인 발효 채소 음식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고구려 역시 채소 재배가 우수했고 '장양(藏釀, 술빚기, 장 담그기 등 발효식품 제조)'을 잘 했다는 기록을 통해 발효 및 저장 기술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김장 문화의 오랜 기반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려시대의 김치: '지(漬)' 문화
우리 문헌에 김치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 문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실린 시 '가포육영(家圃六詠)'에서입니다. 이 시에서 이규보는 순무로 만든 순무장아찌(漬醬)와 소금에 절인 순무김치(漬鹽)에 대해 묘사하고 있습니다. '물에 담근다'는 의미의 한자 '지(漬)'를 김치를 표기하는 데 사용했으며, 이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이문화권(東夷文化圈)의 공통적인 특징이었습니다.
'가포육영'에 언급된 장지(醬漬)와 염지(鹽漬)는 고려시대 김치의 대표적인 형태로 보입니다. 염지는 소금물에 담근 것으로, 오늘날 동치미와 유사한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에는 배추보다는 순무, 오이, 가지 등 다양한 채소를 '지'의 재료로 사용했으며, 파나 마늘과 같은 양념류도 넣어 담갔을 것으로 봅니다. 고려 후기 의학서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도 다양한 채소와 '약념(藥鹽, 양념)'의 개념이 정립되어 있어, 약용 및 식용으로서의 채소 가공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김치의 발전: '저(菹)'와 '침채'
조선시대에는 김치 표기법이 중국식인 '저(菹)'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저'를 엄채(醃菜), 『역어유해(譯語類解)』에서는 함채(鹹菜)라고 표기했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지'가 조선 초중기에는 중국식 표기와 우리말 '딤채'로 함께 사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후 『주방문(酒方文)』과 같은 고 조리서에서는 김치를 침채(沈菜)라고 쓰고 한글로는 '지히'라고 표기했습니다. 최남선은 침채와 지를 합쳐 침지(沈漬)라고 썼는데, 침채나 침지 모두 '채소를 소금물에 절인다'는 의미를 내포하며, 이 단어들에서 오늘날의 김치라는 명칭이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침채', '침지'와 함께 등장하는 단어가 장(藏)입니다. 채소를 겨울 동안 저장한다는 의미의 침장채(沈藏菜) 또는 장채(藏菜)가 김장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조선 태종 대에 궁중에 침장고(沈藏庫)라는 겨울 채소 저장 시설이 있었고, 순조 대 『물명고(物名考)』에서 장채를 '채소의 월동을 위하여 소금절이한 것'으로 설명하는 기록은 김장 문화가 조선시대에 정립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고추의 등장과 현대 김치
오늘날 김치의 필수 재료인 고추가 김치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부터입니다. 고추가 김치 재료로 처음 기록된 문헌은 17세기 초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山林經濟)』입니다. 이후 유중림의 『증보산림경제(增보산림경제)』에서는 오이소박이에 고춧가루와 마늘편을 소로 넣는 김치가 소개되었고, 1800년대 전후의 『규합총서(규합총서)』에서는 고춧가루와 젓갈이 함께 김치 재료로 쓰였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통배추김치가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 이후로, 중국에서 개발된 결구배추(잎이 속이 꽉 차게 둥글게 맺히는 배추) 품종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발달했습니다. 통배추김치나 보쌈김치 형태는 대략 1850~1860년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헌종 대의 『동국세시기』에는 이미 서울 지역의 김장 풍속으로 무, 배추, 마늘, 고추, 소금으로 김장을 담그고, 동치미, 장김치(醬菹), 섞박지(雜菹) 등을 담근다는 기록이 나타나 현재와 유사한 김장 형태가 이때 정립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김장 담그는 과정: 정성의 손길
지역별로, 가정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인 포기김치(배추김치)를 담그는 김장 과정은 여러 단계를 거칩니다.
주재료 준비: 배추와 무
김장의 주재료는 당연히 배추와 무입니다. 김장철에 맞춰 속이 꽉 차고 단단하며 싱싱한 좋은 배추와 무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배추는 2.5kg 정도의 적당한 크기에 잎 색이 짙고 흰 줄기가 넓고 얇은 것이 김장하기 좋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절이기: 김장의 첫걸음
김장의 첫 단계는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것입니다. 배추를 반으로 가르거나 통째로 소금물에 담그거나 소금을 켜켜이 뿌려 숨을 죽입니다. 절이는 과정은 배추의 수분을 적당히 빼내어 양념이 잘 배도록 하고, 미생물 번식을 억제하여 김치가 물러지거나 변질되는 것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절일 때는 주로 입자가 굵은 천일염을 사용합니다. 소금의 양과 절이는 시간은 배추의 상태나 기온에 따라 조절해야 합니다.
김칫소 만들기
배추가 절여지는 동안 김치에 넣을 김칫소, 즉 양념을 만듭니다. 김칫소에는 고춧가루, 다진 마늘, 다진 생강, 파, 무채, 젓갈 등 다양한 재료가 들어갑니다. 지역별 특색이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이 바로 이 김칫소의 재료와 배합 비율입니다. 김칫소 양념에 사용되는 고춧가루, 마늘, 생강 등은 주로 입자가 고운 정제염으로 간을 맞추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배추김치의 배합 비율은 배추 100에 무 10, 파 1, 고춧가루 23, 마늘 11.5, 생강 0.5, 젓국 2, 소금 2~3퍼센트 정도를 기본으로 하되, 집집마다 가감합니다.
양념 버무리기와 속 채우기
잘 절여진 배추는 깨끗한 물에 여러 번 헹궈 소금기를 빼고 물기를 충분히 뺍니다. 준비된 김칫소 양념에 무채 등을 버무려 속을 만든 후, 절인 배추의 잎 사이사이에 양념 속을 골고루 채워 넣습니다. 이때 양념이 골고루 묻도록 정성껏 버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큰 무는 큼직하게 썰어 소금, 고춧가루로 버무려 배추김치 사이사이에 넣어 함께 담그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시원한 맛을 더할 수 있습니다. 양념을 다 채운 배추는 겉잎으로 잘 감싸 공기가 들어가지 않도록 모양을 만듭니다.
젓갈의 종류와 활용
김장 김치의 감칠맛을 더하는 중요한 재료는 젓갈입니다. 지역별로 선호하는 젓갈의 종류와 사용 방식이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새우젓, 멸치젓, 조기젓, 황새기젓(황석어젓) 등이 많이 사용됩니다. 추운 북부 지역에서는 깨끗하게 잘 삭은 날젓국을 그대로 사용하여 젓갈의 효소 작용으로 김치의 향긋한 맛을 살리기도 하지만, 따뜻한 남부 지역에서는 젓갈이 변질될 우려가 있어 달여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다채로운 김장의 세계: 지역별 특징
김장 김치는 담그는 시기와 재료, 양념, 젓갈 사용 등에 따라 지역별로 매우 다채로운 특징을 보입니다. 크게 보면 남부 지방은 맵고 짠 편이고, 북부 지방은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강한 편입니다.
- 남부 지방 김장: 주로 멸치젓이나 갈치속젓 등을 사용하여 맵고 짠맛이 강하며, 양념을 넉넉히 사용하는 편입니다. 갓김치, 고들빼기김치 등 다양한 종류의 김치를 담급니다.
- 북부 지방 김장: 젓갈과 고춧가루를 적게 사용하여 비교적 담백하고 시원한 맛이 특징입니다. 동치미, 백김치 종류가 발달했으며, 소에 배, 밤 같은 과일을 넣어 단맛과 시원함을 더하기도 합니다. 새우젓이나 황석어젓 등을 주로 사용합니다.
전국 각지에서는 지역의 특산물이나 식습관에 맞춰 매우 다양한 종류의 김장 김치 또는 겨울 김치를 담급니다. 몇 가지 대표적인 지역별 김치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 경기도 김장: 호박김치, 장김치, 보쌈김치, 섞박지, 석류백김치, 비지미 등
- 충청도 김장: 굴깍두기, 고춧잎김치, 달랭이동김치, 더덕물김치, 무짠지, 젓무김치 등
- 전라도 김장: 비늘김치, 갓김치, 고들빼기김치, 부추김치, 깻잎김치, 쪽파김치 등
- 제주도 김장: 청각물김치, 솎음배추김치, 남삐짐치, 전복김치 등 (해산물 활용)
- 경상도 김장: 젓국섞박지, 골금짠지, 부추젓지, 콩잎김치, 대구 아가미 깍두기, 갈치 깍두기 등 (젓갈 및 해산물 활용)
- 강원도 김장: 서거리김치(명태 아가미 사용), 열무감자김치, 오징어김치, 명태깍두기, 해물김치 등 (해산물 및 감자 활용)
- 함경도 김장: 함경도식 배추김치, 삼갓김치, 가자미식해, 도루묵 채 김치 등 (해산물 활용)
- 평안도 김장: 가지물김치, 분디김치, 꿩김치, 무송송이 등 (담백한 맛)
- 황해도 김장: 나박김치, 풋고추오이동김치, 호박지, 고수김치 등 (다양한 채소 활용)
이 외에도 각 지역마다, 집집마다 대대로 내려오는 고유의 김장 비법과 김치 종류가 있어 한국 김장 문화의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김치 보관: 겨우내 맛을 지키는 지혜
김장 김치의 맛을 겨우내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은 김장만큼이나 중요한 과정입니다. 김치는 영상 4~5도 전후의 저온에서 천천히 발효될 때 가장 맛있게 익습니다. 온도가 높으면 너무 빨리 시어지고, 발효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맛이 떨어집 수 있습니다.
전통 보관 방식: 땅속 김치독
과거에는 김장 김치를 김치독(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어 보관했습니다. 땅속의 지열(地熱)은 겨울철 추위에도 김치가 얼지 않고, 외부 기온 변화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아 비교적 일정한 저온을 유지시켜 주었습니다. 김치독을 짚으로 싸서 보온 효과를 높이거나, 김치를 담은 독을 깊이 묻어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했습니다.
김치를 담을 때는 김치독에 김치를 단단히 눌러 담아 공기와의 접촉을 최소화했습니다. 김치 맨 위에는 우거지(배추 겉잎)를 덮어 공기를 막아 김치 표면이 마르거나 산패(酸敗, 시큼하게 변질되는 것)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현대적 보관 방식: 김치냉장고
현대에 와서는 전통적인 땅속 보관 방식 대신 냉장고를 이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특히 김치의 종류별, 익힘 정도별로 최적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김치냉장고가 등장하면서 김치를 더욱 편리하고 오랫동안 맛있게 보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반 냉장고에도 김치 보관 기능이 탑재되거나 김치 전용 저장 용기가 나오는 등, 현대 기술이 김장 김치의 맛을 지키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김장은 한국인의 겨울을 나기 위한 실용적인 지혜이자, 가족과 공동체의 정을 나누고 전통 식문화를 이어가는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시대 변화에 따라 담그는 양이나 방식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지만, 김장을 통해 겨울을 준비하고 공동체의 의미를 되새기는 문화는 여전히 우리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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