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 2월 4일경 입춘(立春)에 문에 붙이는 '입춘축'은 새해의 복을 기원하고 액운을 물리치는 전통 풍습입니다. 입춘축의 유래, 다양한 명칭, 궁중과 민간의 제작 및 게시 과정, 그리고 벽사 및 기복의 의미를 담은 풍부한 문구 사례를 민속학적으로 분석합니다. 한국 세시풍속과 민간신앙 이해, 준학예사 시험 대비에 필수 정보입니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글, 입춘축(立春祝) 이해하기
입춘(立春)은 24절기 중 첫 번째 절기로, 대개 양력 2월 4일경에 해당하며 겨울의 끝이자 봄의 시작을 알리는 날입니다. 농경사회였던 전통사회에서 입춘은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는 중요한 시점이자, 상징적으로는 새해를 맞이하는 날로 여겨졌습니다. 이러한 입춘날, 다가올 새해의 복을 기원하고 집안에 깃들 수 있는 나쁜 기운이나 액운을 물리치기 위해 문이나 기둥 등에 좋은 글귀를 써서 붙이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를 '입춘축(立春祝)' 또는 '춘축(春祝)'이라고 합니다.
입춘과 '입춘축'의 정의
입춘은 태양의 황도 상 위치로 정해지는 절기이지만, 예로부터는 한 해의 운세가 새로 시작되는 날로 여겨져 설날(음력 1월 1일) 이상으로 신년의 의미를 부여받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입춘날에는 봄이 왔음을 축하하고, 한 해의 안녕과 행운, 풍요를 기원하며, 때로는 스스로를 경계하는 내용을 담은 글을 썼습니다. 이 글귀를 적은 종이를 대문이나 기둥 등에 붙이는 행위와 그 글 자체를 통틀어 입춘축이라고 합니다.
'입춘축'을 부르는 다양한 이름들
입춘축은 그 형태나 붙이는 장소, 혹은 의미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글을 적은 종이 자체를 가리킬 때는 '입춘첩(立春帖)', '춘첩(春帖)', '춘첩자(春帖子)', '입춘방(立春榜)', '춘방(春榜)', '문첩(門帖)' 등으로 불렀습니다. 특히 문이나 기둥에 붙일 때 짝을 이루는 대구(對句)의 형태로 쓰는 경우가 많아 '춘련(春聯)', '대련(對聯)', '문대(門對)'라고도 칭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명칭은 입춘축 풍습이 우리 전통사회에서 얼마나 보편적이고 중요한 세시풍속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입춘축의 유래와 역사적 변천
입춘축 풍습의 정확한 기원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내려온 벽사(辟邪) 및 축원(祝願) 풍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문신(門神), 도부(桃符)에서 시작된 벽사의 기원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등 일부 문헌에서는 입춘축의 유래를 중국의 오래된 벽사 풍습에서 찾고 있습니다. 설날에 흉악한 귀신을 쫓기 위해 복숭아나무 판(도부, 桃符)에 신도(神荼)와 울루(鬱壘)라는 문신(門神)의 형상을 그려 문에 걸었던 것에서 시작하여, 이후에는 이들 신의 이름 네 글자('신도울루')를 써서 붙이게 된 것이 입춘축의 시초라고 봅니다. 이는 글자가 가진 주술적인 힘을 믿고 이를 통해 액운을 막으려 했던 초기 민간신앙과 연결됩니다.
다른 견해로는 『형초세시기』에 기록된 것처럼 입춘날 봄의 행운을 부른다는 '의춘(宜春)' 두 글자를 문에 붙였던 풍습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또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섣달그믐(제석)에 모든 백성에게 춘련을 문에 붙이도록 명했다는 기록도 있어, 광범위하게 글귀를 붙이는 풍습의 확산에는 이러한 정치적인 영향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입춘축은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벽사 및 기복(祈福) 풍습과 깊은 관련을 맺고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입춘축 풍습
우리나라에서 입춘축과 유사한 '춘첩자'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나타납니다. 『동문선(東文選)』에는 김부식이 궁중(내전)에서 쓸 춘첩자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려를 방문했던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개경 광화문(廣化門)에 붙어 있던 춘첩자의 구체적인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눈 자취 아직도 삼운폐에 있는데(雪痕尙在三雲陛) 햇살이 비로소 오봉루에 오르네(日脚初升五鳳樓) 제후들 잔 올려 축수하니(百辟稱觴千萬壽) 곤룡포 자락에 서광이 어리네(袞龍衣上瑞光浮)"라는 이 시는 궁궐의 장엄함과 새해를 맞이하는 축하 분위기, 그리고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도 왕과 태후를 위한 춘첩자가 5언 또는 7언시 형태로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이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도 입춘축이 궁중을 중심으로 새해를 축하하고 왕실의 장수를 기원하는 중요한 풍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궁중과 관료 사회의 입춘축
조선시대에도 입춘축 혹은 춘첩자라고 하여 봄을 축하하고 새해를 기원하는 글을 짓고 붙이며, 이를 선물로 주고받는 풍습이 이어졌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국가 기관인 지제교(知製敎)가 5언 절구 시를 지어 올리면 그중 뛰어난 것을 골라 궁궐 문에 붙였습니다. 세종 때에는 춘첩자가 '연상시(延祥詩)', 즉 새해를 맞아 좋은 기운을 불러들이고 경사스러운 일을 기원하는 시로서, 조상의 사당 문에는 붙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성종대 이후로는 문신(文臣)들을 대궐 뜰에 모아 놓고 특정 운(韻)에 맞춰 5언 또는 7언 율시(律詩)를 짓게 하는 등 춘첩자 창작이 체계화되었습니다. 영조 때에는 춘첩자를 지어 올릴 문신의 수를 정하기도 했으며, 정조 때에는 입춘첩자가 단순히 송도(頌禱, 칭송하고 기원함)뿐만 아니라 잠규(箴規, 타이르고 경계함)하는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하여, 규장각 학사들에게 직접 춘첩 문구를 뽑아 쓰게 했습니다. 오늘날 규장각 도서관에는 정조대부터 순조대까지 규장각 대신들이 쓴 춘첩자를 모아 엮은 『춘첩자』라는 책이 남아 있어 당시 풍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동국세시기』나 『경도잡지(京都雜志)』와 같은 조선 후기 세시기에는 입춘축을 제작하고 게시하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승정원에서 미리 시종신(侍從臣)과 문관들에게 연상시를 지어 올리게 하고, 홍문관, 예문관, 규장각의 제학들이 운자를 내주고 채점하여 합격한 시를 대궐 안 기둥이나 문설주에 붙였다고 합니다. 이는 중국 사마광의 『일록(日錄)』에 한림원에서 춘사를 지어 궁중에 붙였다는 기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어,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에서 공유되었던 궁중 세시 풍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입춘축에 담긴 새해의 염원: 다양한 문구와 상징
입춘축에 쓰이는 글귀들은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소망과 믿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문구들은 벽사(辟邪), 기복(祈福), 덕담, 교훈 등 여러 의미를 담고 있으며, 집안의 구조와 기능에 따라 다르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입춘축 게시의 시점과 장소
입춘축은 입춘날, 정확히 태양의 황도 상 위치가 45도에 이르는 입춘점에 태양이 도달하는 그 시각에 맞추어 붙이는 것이 좋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그 시간에 봄의 기운이 가장 왕성하게 들어오므로, 그때 맞춰 입춘축을 붙여야 가장 큰 효험을 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붙이는 장소는 주로 집의 대문, 중문, 기둥, 문설주(문의 기둥) 등이었습니다. 사대부 집에서는 궁중의 춘첩자처럼 직접 시나 글을 지어 붙이거나 옛 성현의 좋은 글귀를 따서 썼고, 일반 백성들은 명필가에게 글을 받거나 미리 인쇄된 글을 구해 붙였습니다. 가게에서도 입춘축을 붙여 새해 장사의 번영을 기원했습니다.
벽사(辟邪)와 기복(祈福)을 담은 대표 문구들
입춘축 문구는 대부분 한 쌍을 이루는 대련(對聯)의 형태로 쓰이며, 길상과 벽사의 의미를 동시에 담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국세시기』와 『경도잡지』에 전하는 대표적인 입춘축 문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벽사(辟邪) 기원:
문신호령(門神戶靈) 가금불상(呵噤不祥)
(문신과 문령이 호령하여 상서롭지 못한 것을 막으리)거천재(去千災) 래백복(來百福)
(온갖 재앙은 가고 백 가지 복은 오라)재종춘설소(災從春雪消) 복축하운흥(福逐夏雲興)
(재앙은 봄눈 따라 사라지고 복은 여름 구름 따라 일어나리)계명신세덕(鷄鳴新歲德) 견폐구년재(犬吠舊年災)
(닭 울음소리에 새해의 덕이 오고 개 짖는 소리에 묵은 해의 재앙 물러가라)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개문백복래(開門百福來)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오고 문을 열면 온갖 복이 오리)
기복(祈福) 기원:
국태민안(國泰民安) 가급인족(家給人足)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편안하며 집집마다 풍족하리)우순풍조(雨順風調) 시화세풍(時和歲豊)
(비는 순조롭고 바람은 화창하여 시절이 평화롭고 한 해가 풍년이리)수여산(壽如山) 부여해(富如海)
(수명은 산처럼 길고 재물은 바다처럼 풍족하리)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입춘에 크게 길하고 새해에는 경사스러운 일이 많으리) - 오늘날 가장 흔히 사용됨.부모천년수(父母千年壽) 자손만대영(子孫萬代榮)
(부모님은 천년을 사시고 자손은 만대까지 번영하리) - 가족의 건강과 번영 기원.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 사방무일사(四方無一事)
(천하가 태평한 봄이요, 사방에 아무 일 없으리)문영춘하추동복(門迎春夏秋冬福) 호납동서남북재(戶納東西南北財)
(대문은 춘하추동 사계절의 복을 맞이하고 집안은 동서남북 사방의 재물을 받아들이리) - 가장 포괄적인 기원.천증세월인증수(天增歲月人增壽) 춘만건곤복만가(春滿乾坤福滿家)
(하늘은 해를 더하고 사람은 수명을 더하며 봄이 온 세상에 가득하니 집안에 복이 가득하리)
기타 상징 및 덕담 (단첩 포함):
요지일월(堯之日月) 순지건곤(舜之乾坤)
(요임금과 순임금 시대처럼 태평성대이리) - 태평성대 기원.애군희도태(愛君希道泰) 우국원연풍(憂國願年豊)
(임금 사랑하며 도가 태평하길 바라고 나라 걱정하며 풍년이 들길 바라네) - 관료나 지식인의 염원.춘도문전증부귀(春到門前增富貴)
(봄이 대문에 이르니 부귀가 더하리) - 단첩의 예.
현대의 입춘축 문화와 게시 방법
오늘날에도 많은 가정에서 입춘날 '입춘대길 건양다경'과 같은 입춘축을 써서 붙이는 풍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손으로 직접 쓰는 경우도 있지만, 인쇄된 입춘축을 구해 사용하기도 합니다. 입춘축을 붙일 때에는 책력(冊曆)에 나와 있는 정확한 입춘 시각에 맞춰 붙이는 것을 중시합니다.
붙이는 장소와 순서에도 전통적인 방식이 남아 있습니다. 가장 먼저 조상께 입춘이 왔음을 알리기 위해 사당에 가서 입춘축(날짜와 시각을 적은 축문 형식)을 붙입니다. 그 후 집의 구조와 기능에 맞게 대문, 중문, 기둥, 각 방 등에 순서대로 붙입니다. 예를 들어 대문에는 가장 대표적인 '입춘대길 건양다경'을 붙이고, 중문에는 벽사의 의미가 강한 '문신호령 가금불상'이나 '신도울루'를 붙입니다. 기둥에는 가족 전체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천증세월인증수 춘만건곤복만가' 등을 붙이며, 부모님 방에는 '부주평안(아버지 방)', '모주평안(어머니 방)'과 같이 개인적인 안녕을 비는 글을 붙이기도 합니다. 곳간에는 '의이장지(義以藏之, 의롭게 간직하고), 절이용지(節以用之, 절약하여 사용하리)'와 같은 검소함과 바른 마음가짐을 기원하는 글을 붙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중(喪中, 가족의 상을 당하여 슬픔 중에 있는 것)인 집에서는 입춘축을 붙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는 축하의 성격이 강한 입춘축 풍습이 일생의례(죽음)와 관련된 금기 사항을 지켰음을 보여줍니다.
입춘축 관련 기타 풍속 및 인접 국가 사례
입춘축 풍습은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며, 중국 등 인접 국가와 공유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또한 입춘과 관련된 다양한 벽사 및 축원 풍습이 함께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궁중의 벽사 풍속과 입춘첩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입춘축 외에도 새해를 맞아 액운을 물리치기 위한 다양한 풍습이 있었습니다. 관상감(국가 천문 기관)에서는 붉은 주사(朱砂)로 벽사 문구를 써서 대궐 문설주에 붙이거나, 불경인 『은중경(恩重經)』의 진언(眞言, 주문)을 인쇄하여 문에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풍습들은 입춘축과 마찬가지로 새해 벽사를 위한 의례적인 행위였습니다. 또한, 국왕이 백성들에게 내린 특별한 교지인 별유(別諭)를 입춘첩처럼 사용하여 공고(公告)의 의미와 함께 축원의 의미를 담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춘련(春聯) 풍속 비교
중국에서도 우리나라의 입춘축과 유사한 '춘련(春聯)' 풍습이 매우 발달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로 섣달그믐이나 정월 초하루에 붉은 종이에 춘련을 써서 대문 등에 붙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문신인 신도와 울루의 이름이나 인봉구학(기린, 봉황, 거북, 학 등 상서로운 동물)과 같은 길상 문구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지역에 따라 정월 대보름(상원)에 춘련을 몰래 떼어가는 풍습(훔치면 복이 온다고 믿음)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어, 입춘축/춘련 풍습이 동아시아에서 넓게 공유되면서도 각 지역의 문화적 특색에 따라 변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민속학적 관점에서 본 입춘축의 의미
입춘축은 한국 민속학에서 세시풍속, 민간신앙(속신), 구비문학, 그리고 궁중 문화와 민간 문화의 교류 등 다양한 분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합니다.
세시풍속이자 속신(俗信)으로서의 입춘축
입춘축은 입춘이라는 특정 절기에 맞춰 행해지는 대표적인 세시풍속입니다.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순환에 인간의 삶을 맞추고, 이를 통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복을 얻으려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줍니다. 또한, 입춘축은 글귀 자체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고 이를 통해 액운을 막고 복을 불러들이는 속신(俗信)의 성격을 지닙니다. 이는 말이나 글에 영적인 힘이 있다고 믿는 언령주술(言靈呪術)과도 연결되며, 글을 통해 현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려는 민간 신앙의 한 형태입니다.
민간신앙과 구비문학의 결합
입춘축의 문구들은 다가올 한 해에 대한 사람들의 간절한 민간신앙을 직접적으로 드러냅니다. 국가의 태평성대, 개인과 가족의 건강과 장수, 부귀영화, 자손 번영, 풍년 기원, 그리고 재앙으로부터의 보호 등 전통사회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와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소망들은 정형화되거나 널리 통용되는 문구의 형태로 전승되는데, 이는 구비문학의 한 갈래로서 민중의 생각과 염원이 언어적으로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일부는 유교 경전이나 문학에서 차용되었거나 지식층에 의해 창작되었지만, 대중적으로 선택되고 사용되는 과정에서 민간 신앙과 결합하여 민속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궁중 문화와 민간 문화의 교류
입춘축은 처음에는 궁중과 관료 사회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체계화된 풍습이었으나, 점차 민간으로 확산되어 보편적인 세시풍속이 되었습니다. 궁중에서는 뛰어난 문신들이 글을 짓고 도화서에서 그림(세화 중 글씨 형태)과 함께 제작하는 등 격식을 갖추었지만, 민간에서는 각 가정의 필요와 신앙에 맞게 간소화되거나 특정 길상/벽사 문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형태로 변모했습니다. 이는 국가 주도의 문화가 민간에 영향을 미치고, 동시에 민간의 보편적인 신앙과 염원이 다시 국가 의례나 풍습의 내용에 영향을 주었던, 궁중 문화와 민간 문화의 상호작용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입니다.
민속학 연구와 준학예사 시험 대비를 위한 입춘축 이해
입춘축은 입춘이라는 특정 절기에 행해지는 한국의 중요한 세시풍속이자, 새해의 벽사와 기복을 기원하는 민간신앙(속신)의 구체적인 발현 형태입니다. 또한, 그 문구는 전통사회의 가치와 소망을 담은 구비문학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며, 궁중과 민간에서 함께 향유되며 발전한 문화 교류의 사례이기도 합니다.
민속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나 일반인들에게 입춘축은 한국인의 시간관념(절기와 세시), 신앙생활(벽사와 기복), 언어에 대한 믿음(언령주술), 그리고 사회 계층별 문화의 공유와 차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소재입니다.
특히 준학예사 자격시험의 선택과목인 '민속학'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입춘축은 시험에 자주 등장할 수 있는 핵심 개념입니다. 입춘축의 정의와 다양한 명칭, 입춘과의 관련성, 유래에 대한 여러 학설, 고려 및 조선시대의 역사적 변천 과정(궁중 중심의 제작 및 유통), 벽사/기복 등 주요 기능, 그리고 대표적인 입춘축 문구(입춘대길 건양다경 등)와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입춘축은 비록 그 형태나 방식은 조금씩 변했지만, 새해를 맞이하며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라고 어려운 일 없이 무사히 한 해를 보내고자 하는 우리 민족의 간절한 소망과 지혜가 담겨 있는 살아있는 전통입니다. 입춘축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 전통문화의 깊이와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조상들의 따뜻한 마음과 염원을 느끼는 소중한 경험이 되기를 바랍니다.